[박철수의 '거취와 기억'] (2) 1960~1970년대 민영주택과 아파트 '식모방'
[경향신문] ㆍ고향 그리며 눈물로 밤 지새웠을 ‘식모’ 1.5평에 갇힌 삶
우리나라의 1960년 대외무역 총액은 3억7600만달러로 세계 67위였다. 이 중 수출은 3300만달러로 세계 112위를 기록했고, 1964년에는 수출 1억달러를 ‘돌파’했다. 당시 수출 1억달러를 기록한 나라는 에티오피아, 튀니지, 카메룬 정도였고, 필리핀과 대만이 각각 7억달러, 4억달러였다. 정부는 수출 규모의 빠른 증가세에 힘입어 대외수출로 한국경제를 부흥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어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출주도형 성장전략으로 고쳤다. 섬유, 합판, 가발과 같은 노동집약적인 경공업이 중점 수출산업으로 육성되었고, 특히 가발산업은 정책적 지원에 따라 1970년에 10대 수출품목에 자리하자마자 곧 대미 가발수출국 1위에 올랐다. 1972년의 일이다. 눈금저울을 보퉁이에 싸 들고, “머리카락이나 은수저 팔라”고 외치던 이에게 누이가 곱게 기른 머리를 잘라 팔아 몇 푼을 챙기고 우수리를 엿으로 바꾸어 먹던 바로 그 시절이다.
1965년과 1970년 우리나라의 인구증가율은 연평균 3.5%와 1.5%였다. 이때 서울의 인구증가율은 각각 9.2%와 7.8%를 기록하며 평균 인구증가율의 3~5배를 기록했다. 65세 이상 인구비율도 전국적으로 3% 정도였지만 서울은 1970년대 초반 1.8%에 머물렀다. 서울로 대표되는 전국 대도시가 청년으로 북적인 것이다. 젊은 노동인구의 과잉시대였다. 그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했을까.
■노동자들의 아픔 서린 구로공단
이호철의 장편 <서울은 만원이다>는 1966년 신문에 연재됐고, 조정래의 중편 <비탈진 음지>가 1973년에 발표되었는데 이들 소설이 비록 허구더라도 당시 풍경을 되살리는 데 모자람이 없다. 그러니 어디에서 무엇을 했을까 물었던 그들은 경남 통영에서 올라와 몸을 팔았던 ‘길녀’나 ‘미경’일 수도 있고, 이리 출신의 책장수 ‘상현’이거나 카멜레온처럼 이름을 바꿔가며 무작정 살았던 ‘동표’일 수도 있다. 어미 임종도 못한 채 소식이 끊긴 지 10년이 된 칼갈이 ‘복천영감’의 큰아들 ‘영기’거나 막내임에도 영기 대신 장남이 되어버린 ‘영수’ 혹은 그의 누이 ‘영자’이기도 하다.
포항종합제철은 1970년 4월1일 준공됐다. 그해 12월31일 수출 10억달러를 ‘달성’했다. 경남 마산과 전북 이리의 수출자유지역이 본격적인 가동에 들어갔고, 1964년에 수출산업공업지구로 지정된 구로공단이 확장되면서 섬유, 의류, 신발, 피혁 등 경공업 제품 수출이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바로 이들이 값싼 노동력을 팔았던 곳이다. 재단사 전태일도 이들 가운데 하나다.
또 있다. 1964년에 발표된 글을 하나 보자. “우리들 가정에서 고용인이라면 가사를 돌보는 식모, 소제나 기타 힘든 일을 돕는 사용인(남성), 아이를 보는 소녀 등으로 이 중에서 가장 흔한 것이 식모”라고 언급한 대목이다. 남의 집 배냇소를 훔쳐 팔고 야반도주한 복천영감이 서울에서 칼을 갈다가 우연히 만난 보성 출신의 ‘금자’는 식모살이 온 아가씨였으니 ‘금자’거나 영수의 누이 ‘영자’가 바로 그들이다. 김진초의 소설 <교외선>에서 서울로 식모살이 나간 영자 언니를 따라 식모살이가 하고 싶었다는 경기 송추의 열한 살 소녀가 그들이다. 조정래의 ‘영자’가 곧 김진초의 ‘영자’이고, 조선작의 ‘영자’인 셈이다.
손창섭의 소설 <인간교실>은 식모살이의 실상을 들려준다. 5·16 쿠데타로 된서리를 맞아 실직자가 된 ‘주인갑’이 그의 두 번째 처인 ‘남혜경’과 전처 소생의 딸인 ‘광숙’, 그리고 ‘보순이’로 불리는 식모가 서울 흑석동의 문화주택에서 살아가는 풍경을 그린 소설에서 “8월 생활비/ 주식비(배급 외) 2000원, 부식비 3000원, 연료비(연탄) 350원, 가장 용돈 1500원, 주부 용돈 1500원, 광숙 용돈 400원, 사교비(손님) 1000원, 의복비 1500원, 교육비 300원, 보건비 500원, 교양오락 1000원, 인건비(식모) 600원, 수도전기 500원, 세금 300원, 가족 저축 1000원”이라는 대목이 등장한다.
식모 ‘보순이’의 한 달 인건비가 ‘주인갑’의 용돈 1500원의 3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화폐개혁 이후의 일이니 1962년쯤으로 읽히는데 ‘가장 흔한 고용인이 식모요, 그들의 노동조건은 형편없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식모를 우리말로 고쳐 부른다면 가장 적당한 말이 무엇일까. ‘안잠자기’ 정도가 아닐까. 물론 침모나 유모처럼 ‘밥어미’라 부를 수 있겠지만 식모가 밥만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안잠자기’가 외려 어울리는 말이다. 안잠자기란, 말뜻 그대로 집을 들고 나는 일 없이 자신의 고용주 집에서 동거했음을 뜻한다.
■민영주택 귀퉁이에 있던 ‘식모방’
그렇다면 그들의 집안 거처는 어땠을까? 1960년대 초 민영주택들이 당시 상황을 잘 설명한다. 당시 민영주택은 융자를 얻어 집을 짓는 경우였는데, 집을 지을 사람은 융자금의 원금과 이자를 갚을 능력과 함께 집 지을 땅을 갖고 있어야 했고, 건축비용 역시 스스로 충당할 수 있어야 했다. 당연하게도 경제적으로 안정된 부류다. 그들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집안일을 대신하는 사람을 고용했고, 이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 집을 지었다. ‘안잠자기’의 거처가 ‘식모방’으로 번역된 것이다. 드러내놓고 언급하지는 않지만 20평 민영주택 부엌 오른편의 귀퉁이에 자리 잡은 좁은 방이 식모방이었다.
하나 더 보자. 온돌방이 5개인 민영주택을 소개하는 글에서는 부엌 옆에 조그마한 식모방이 있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집안에서 가장 넓은 온돌방과 넓이를 비교하면 4분의 1~6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 손창섭의 소설 <인간교실>과 1960년대 초기의 중산층용 민영주택을 소개한 <새로운 주택>이 거의 같은 시기에 나온 것이니 식모의 급료는 자신을 고용한 사람의 용돈 3분의 1에 불과했고, 떠나온 고향을 그리며 눈물로 밤을 지새웠을 식모의 방 크기는 안방의 6분의 1에 불과했다.
당시 건축학자들이나 건축가들의 대체적인 생각은 한결같았고, 잡지를 통해 식모방의 설계 유의사항을 조언했다. 식모는 어디까지나 가사노동자이고, 노예적인 고용인의 관념은 이미 달라졌다고 하면서도 식모방의 위치는 부엌과 가까운 곳에 두고, 문간 옆에 자리해 손님 응접에 편리하도록 하며, 뒷문간이나 다용도 공간에 붙여 행상과의 교섭, 장보기 등 출입하는데 편안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식모가 무엇을 했는가를 구체적으로 밝힌 것이다. 게다가 향은 특별히 고려할 것이 없다고 하였고, 면적은 1.5평에서 2평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이 당시의 보편적인 생각이었다. 더구나 식모방은 될 수 있으면 리빙룸(거실)이나 가족 침실 공간과는 완전히 차단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으니 한 지붕을 이고 살지만 피붙이들과는 다른 남이라는 점을 전제했다.
대한주택공사의 전신인 대한주택영단이 식모방을 처음 선보인 것은 1956년에 지어진 35평짜리 서울 이태원 외인주택이다. 외인주택은 오로지 외화벌이 등의 목적으로 공급한 경우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남산외인아파트 건설 자금 마련을 위해 일부를 민간에게 불하했으므로 이 집을 구입한 내국인 가운데 일부가 안잠자기를 두고 식모방을 사용했을 것이다. 물론 1950년대에 내국인을 위해 공급한 공공주택에서 식모방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196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서울 한남동 등지의 외국인 주택과 일부 중산층 민영주택을 제외하면 식모방은 일반 주택에선 잘 드러나지 않는다. 단독주택에 식모방이 등장한 것은 1968년에 공급된 서울 화곡동 20평형 주택이다. 1960년대 초의 민영주택과 마찬가지로 북측 귀퉁이에 안방의 5분의 1에 불과한 규모의 온돌방을 두었는데 부엌을 통해 들고 나는 방식으로 당시 전문가들의 조언과 일치한다.
아파트에서 식모방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시기 역시 1968~1969년이다. 단독주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20평형 미만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식모방이 30평형 규모에 이르러 뚜렷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단독주택과 다른 것이라면 외부공간으로의 출입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부엌과 짝을 이루고 다용도실이나 발코니로 불리는 부엌 보조공간과 직접 접속하도록 한 것이다.
1970년대 들어 변한 것이 있다면 한강맨션, 반포주공, 여의도시범아파트 등 중산층을 위한 아파트의 본격적인 등장과 더불어 통상 30평을 기준으로 식모방의 있고 없음이 결정됐다는 것이다. 1970년의 한강맨션 32평, 1973년의 반포주공 32평, 1976년에 완공한 잠실주공5단지 35평 아파트는 마치 규범처럼 이를 따랐다. 세칭 ‘식모방’으로 불리는 공간이 1960년대 민영주택에서 시작해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에 보편적인 중산층아파트로 전이된 것이고, 30평형 규모를 경계로 있고 없음이 관행화된 것이다.
■중산층아파트에서 사라진 ‘식모방’
우리나라는 1976년부터 1988년에 이르기까지 연평균 10%에 이르는 경제성장을 지속했다. 5·18민주화운동과 6월항쟁을 거쳐 획득한 것이 절차적 민주주의에 그쳤지만 경제 상황은 나아져서 먹고사는 일은 그 전보다 풍요로운 상황을 맞이한다. 일자리는 늘었고, 선택의 폭은 넓어졌다. 공정하고 계약이 아닌 상태에서 개인의 인신을 남에게 의탁하는 일은 차츰 사라지거나 모습을 바꾸었다. 몸을 의탁하지 않고도 일상을 영위할 개인적 자신감도 붙었고, 인건비가 올랐기 때문이다.
목동신시가지아파트, 아시아선수촌아파트, 올림픽선수촌아파트 등 새롭게 등장한 중산층용 아파트에서도 더 이상 식모방은 등장하지 않는다. 삼베고쟁이 보리방귀 새듯 홀연히 식모방이 사라진 것이다. 물론 이들을 일컫는 말도 안잠자기나 밥어미에서 어멈이나 하녀로, 다시 식모나 가정부 혹은 파출부나 도우미, 가정관리사에 이르기까지 시류에 따라 변했지만 더 이상 집안에 이들이 거처하는 공간이 별도로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공지영의 소설 <부활무렵>의 한 구절을 보자. “봄이면 붕어가 지천이었던 탄천, 그리고 저만치는 어린 그녀가 살던 집이었다. 집은 사라지고 아파트가 들어서고…. 일찍 집을 떠나 서울로, 수원의 공장으로 떠돌다가 다시 고향땅으로 돌아와서 파출부 일을 할 줄 순례는 몰랐다”는 대목이다. 경기 분당 신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식모방’만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을 뿐이다. 식모의 등장과 변모는 분명 고단한 근현대사의 한 장면이다. 그러나 라면 한 개가 도매금으로 18원이요, 콜라 값이 물만 먹으면 40원이고, 병째 사면 45원이던 시절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식모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1.5평에서 삶을 이어가던 이들은 오늘날 고시원의 1.5평에서 희망 없는 일상을 묵묵히 견디는 청년들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박철수 |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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