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수의 '거취와 기억'] (1) "수도 위신 세워라" 독재가 급조한 삶터 중산층의 욕망 담은 '도시의 섬'이 되다
[경향신문] ㆍ상가주택과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
한 장의 사진이 있다. 국가기록원이 ‘이승만 대통령, 서울시내 후생주택 시찰’이라는 이름으로 갈무리한 일곱 장의 기록 사진 가운데 하나다. 사진 촬영 일자는 1958년 4월24일. 이 대통령은 이날 불광동 등 서울시내 여러 곳을 관계자들과 함께 둘러보았고, 포장공사가 한창인 남대문로에서 경찰과 요원들의 겹겹 경호를 받으며 설명을 듣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힌 것이다. 도면을 들고 있는 이는 대통령과 특별한 관계였다고 알려진 중앙산업의 조성철 대표와 정해직 전무. 더블 버튼 정장을 갖춰 입고 대통령의 오른편에 선 이는 손창환 보건사회부 장관이다.
이 사진을 잘 설명하는 기록도 있다. 주택영단의 1958년 기록이다. 그해 대통령은 아직도 전쟁 흔적이 남아있는 남대문 일대를 둘러보다가 판잣집만 무질서하게 들어선 곳에서 아무 데나 거적을 두르고 땅을 파 대소변을 보는 것을 보고 수행 장관들에게 이곳을 재건 복구하여 수도 관문의 위신을 세울 것을 지시했다. 수행 장관들은 연일 구수회의를 열어 묘안을 짜내 서울시내 주요 간선도로변에 ‘상가주택’을 짓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즉시 상가주택 건설에 착수했다. 대통령의 현장 시찰이 이루어진 1958년 말 벌써 일부 ‘시범상가주택’이 준공되었고, 뒤를 이어 ‘일반상가주택’이 속속 완공되었다.
당시 주택은 후생사업이었기에 보건사회부가 상가주택 건설사업 전반을 관장하였다. 민간업체의 자문을 거쳐 육군 공병대가 직접 공사를 맡았으며 주택영단은 자금을 관리하였다. 육군 공병대가 건물을 시공하는 과정에서 미 공군이 사용하는 구멍 뚫린 철판을 공사용 발판으로 몰래 가져다 쓰다가 미 헌병대에 발각되어 심한 항의를 받았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수도 관문으로서의 위신을 높인다는 취지에 따라 서울시내 주요 노선 13곳이 상가주택 건설구역으로 지정되었고, 건설구역 주변의 토지소유자나 조합에 건축비의 40~60%를 융자하였다. 대신 반드시 ‘상가주택 건설요강’을 지킬 것을 조건으로 달았다.
대통령 관심사업이었던 탓에 융자심의를 거치면 마치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군·관·민의 일사불란한 협력이 이루어졌고, 국무회의를 통해 수시로 건설과정이 보고되었다. 그런 까닭에 1964년을 기준으로 서울에만 모두 93동의 상가주택이 준공되었고, 이 가운데 상당수가 아직도 서울 도심 곳곳에 남아 당시 거취의 기억을 전한다.
‘상가주택’이란 불에 타지 않는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4층을 기본으로 하되 1~2층에는 점포를 두고 3~4층에는 주택이 들어서는, 근대적인 건축구조와 설비, 외양을 갖춘 것이었다. 위로 쌓아 올리는 ‘주상복합’인 셈이니 우리에게 익숙한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의 원조쯤으로 불러도 좋겠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노점이나 가게 혹은 잡상이나 ‘점방(店房)’으로 불리던 살림집 겸용 상점도 있었고, 일제강점기 이후엔 도시한옥이 변형된 ‘이층 한옥상가’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상가주택이 지어지던 1950년대까지 이들 대부분은 안정적인 구조 형식을 바탕으로 도시의 인구밀집에 대응하기 위해 건축물을 쌓아올리는 방법을 취한 것이 아니라 거처 가까이에 가게를 두어야 일상생활이 편리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 살림집에 가게를 덧붙어 지은 ‘점방’에 불과했다.
도심 상가주택과 같은 시기에 조성된 불광동 주거지만 하더라도 아직 수돗물이 공급되지 않은 변두리여서 인근에는 어떠한 편의시설도 없었다. 이런 까닭에 102채 주택 가운데 단 두 곳에만 부득이 ‘점포 병용 주택’을 넣었을 뿐이다. 황석영의 소설 <개밥바라기별>에 묘사된 것처럼 불광동만 하더라도 사방이 개구리 울던 논밭이었다가 별안간 교외주거지로 천지개벽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 말에 집중 건설되었던 상가주택 유전자를 이은 것이 ‘맨션’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면서 ‘쇼핑센터’를 아파트 판매 전략의 하나로 삼아 1970년에 준공한 한강맨션아파트와 일부 민간건설업체가 건설한 맨션이다.
반포주공아파트 등 강남 일대의 노선상가아파트가 그 뒤를 잇는다. 이들 사례에는 번듯한 시가지 조성을 위해 차나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도로변에는 상가나 아케이드를 두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논리가 작동했다.
한강이 범람하던 지역을 메워 급격하게 늘어난 중산층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혹은 허허벌판이던 곳에 영등포의 동쪽이라는 이름(永東)을 붙여 신시가지를 조성하기 위해 도심의 상점가처럼 길거리를 환하게 밝히는 번화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터와 집을 한 곳에 뭉뚱그려 두 곳을 오가는 이동 시간을 줄일 뿐만 아니라 에너지 소비를 억제하는 동시에 늦은 밤에도 사람들이 오가는 안전한 도시를 만든다는 도시건축 이념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하더라도 거리를 만든다는 취지는 상가주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된 아파트 중심의 대단위 주거지 조성은 큰길을 따라 점포를 두고 그 위에 주택을 올리는 방식에서 벗어나 차츰 울타리를 두르고 그 안에 상가건물과 아파트를 따로 떼어 섞어 배열하는 ‘단지 만들기 전략’으로 바뀐다. 이름하여 ‘단지 내 상가’가 생겨난 것이다. 그 결과 길거리는 울타리와 높다란 방음벽이 이어진 통로가 되었고, 자가용을 보유한 아파트 주민들은 단지 내 상가에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단지 안의 중앙상가며 노선상가는 대부분 부동산중개사 사무소가 차지하는 형국으로 바뀌었고, 주말이면 대형마트나 백화점으로 차를 몰아 카트 그득하게 일상용품을 구매하는 중산층 가족을 만들어냈다. 단지 내 상가의 몰락이 진행된 것이다.
그렇다면 도심이나 신도시를 불문하고 하늘 높이 치솟고 있는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와 우리가 기억하는 ‘상가주택’은 동일한 유전자를 가진 건축물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의 기억 한 곳에 도사리고 있는 상가주택은 적어도 도시 가로의 활력과 도심지 주거기능의 복합을 의도한 것이지만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는 급격한 주택수요에 기대 상업지역을 아파트가 밀집한 외로운 섬으로 바꾼 것이다. 도시를 외면하는 건축유형이라는 것이다.
건축가 황두진이 회색도시의 미래로 제안한 ‘무지개떡 건축’이나 건축학자 김성홍이 도시건축의 희망으로 꼽은 ‘중간건축’은 모두 오래전 이 도시에 자리 잡았던 ‘상가주택’의 발전적, 창의적 유전자 변용을 제안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가주택은 의미 있게 기억해야 할 현재하는 과거다.
서울시청-조선호텔-한국은행으로 이어지는 길도 1950년대 말 상가주택 건설구역으로 지정한 서울의 13곳 주요 간선도로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니 지난 연말에 벌어졌던 소공동 부영호텔 사업승인 논란도 따지고 보면 1950년대에 지어져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공동 일대의 가로변 상가주택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의 기억 문제로 귀결된다.
<박철수 |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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