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건물에너지 프로그램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
사실, 저는 관련 분야를 전공하는 학자도, 건축설계나 시공을 업으로 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하지만 어찌 하다보니 패시브하우스에 대한 개인적인 좌절을 경험하게 되었고, 이것이 너무도 사무치다 보니
<패시브하우스 콘서트>라는 책까지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책을 쓰면서 처음에는 단열이나 기밀과 같은 패시브하우스의 건축요소에 주로 관심을 가졌으나, 내용을 파고들면 들수록 모든 것은 정량적인 수치로 증명이 되어야만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구체화할 수 없는 것은 모두 사기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죠. 결국 건물 에너지를 구체적 수치로 평가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야 말로 패시브하우스의 핵심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동적해석의 대표적인 프로그램으로는 Energy Plus, Trnsys, ESP-r 등을 들 수 있는데, 입력 변수의 자유도나 계산의 정밀도는 월등하지만 그만큼 복잡하고 다루기가 어렵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특히 수많은 입력변수가 존재한다는 점은 역으로 사용자의 주관이 개입될 여지가 많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쉽게 얘기해서 동일한 대상이라도 프로그램을 돌리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올 확률이 매우 높다는 이야기죠.
반면에 정적해석의 경우에는 현상을 정확하게 예측하는 정확성은 떨어지지만, 비교적 간단한 수식을 사용하고 입력변수도 표준화되어 있어 오히려 결과에 대한 비교가 쉽고 신뢰할 만 하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또한 엄청난 분량의 방정식을 풀어야 하는 동적해석에 비해 계산속도가 월등히 빠른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특징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나라의 공식 건물에너지 평가 프로그램인 ECO2나 독일 패시브하우스연구소(PHI)의 공식 프로그램인 PHPP(Passive House Planning Package)도 정적해석 방법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ECO2나 PHPP를 살펴본 결과 아쉬운 점이 적지 않더군요. ECO2는 입력변수나 일사/음영계산 로직 등이 단순화되어있어 작은 변수에도 극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저에너지 건축물의 해석에는 부족함이 엿보였습니다. 반면에 PHPP는 디테일한 입력변수와 계산로직에는 강점이 있으나 사용이 너무 복잡하고 어렵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건축과 IT를 동시에 전공한 입장에서 보면 참 불친절한 프로그램이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죠.
고민이 되었습니다.
ECO2는 디테일이 부족하고, PHPP는 사용이 불편하고..
더군다나 이 때는 <패시브하우스 콘서트>에 이어 제로에너지 주택의 이론과 에너지계산 방법 등을 다룬 <자립주택>을 집필 중일 때여서 이런 문제점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고민 끝에 엑셀(Excel)로 제로에너지 건물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프로그램을 만들어보기로 했습니다. ISO 13790이라는 레퍼런스가 있으니 뭐 그리 어려울 게 있겠냐는 근거없는 자신감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 바로 새로운 건물에너지 해석 프로그램, 에너지샵(Energy#) 개발 프로젝트였습니다.
2. Energy#의 개발과정
물론 시작은 그리 거창하지 않았습니다.
책의 부록으로 제공할 예제 설명용 프로그램 정도로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당시 공직생활 중 운이 좋게도 국비유학의 기회를 잡아 시간적 여유가 있었고, 전직 프로그래머로서 일종의 승부욕까지 더해지다 보니 일이 생각보다 커지게 되었습니다. 작업을 하면 할 수록 완성도 높은 프로그램에 대한 욕심도 생겼습니다. 그렇지만 A부터 Z까지 하나의 완결된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만은 않더군요.
우선 ISO 13790이나 PHPP 만으로는 커버할 수 없는 부분들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에너지와 관련된 수 많은 ISO(국제표준), EN(유럽표준), DIN(독일표준) 기준들과 씨름했고 내용을 보완하는 데 필요한 논문들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우리 나라에는 정확한 일사정보를 포함한 제대로 된 표준 기후데이터가 정리되어 있지 않아 상당히 고생을 했습니다. 기상청, 에너지기술연구원의 자료와 해외 기관이나 상용기후프로그램(Meteonorm)에서 제공하는 국내 기후데이터를 하나하나 비교해가며 16개 지역의 시간별 일사데이터를 정리하는 데 꼬박 한 달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페레즈(Perez) 모델을 이용한 정확한 일사량 계산, 삼각함수의 향연이라 할 수 있는 시간 단위 음영계산, 배관 손실을 고려한 환기에너지 계산 등의 난관을 해결하는 데에도 한참이 걸렸던 기억입니다. 직관적인 사용자 인터페이스 디자인도 건축설계 이상의 고민을 요구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힘든 문제를 해결하며 어지럽게 펼쳐진 논리를 하나하나 꿰어 가는 성취의 기쁨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없었다면 아마도 유학생활의 대부분을 이 프로그램의 개발에 쏟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일단 Energy#을 완성하긴 하였으나, 말 그대로 베타(Beta) 버전이었으므로 실전 투입에 앞서 숙성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한국패시브건축협회와 패시브제로에너지건축연구소(IPAZEB)에서 기술검토에 동참해 주시기로 하셨고, 1년간 총 여덟차례에 걸친 기술 세미나를 통해 프로그램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2016년 4월 2일, 드디어 버전 1.1로 세상에 첫선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금쪽같은 토요일을 힘들었던 기술검토 세미나에 할애해 주신 협회와 연구소 관계자 분들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3. Energy# - 95% 보통의 건물을 위한 최적의 의사결정 보조도구
어떤 분은 "뭐 이런 도깨비 같은 프로그램이 나와 우리를 헷갈리게 만드나"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기존에도 이미 수많은 프로그램들이 있는데 왜 굳이 또 하나의 프로그램이 나와야만 하는가는 반드시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Energy#은 기본적으로 단일 존(Zone) 대상의 에너지 해석 프로그램입니다. 다시 말해, 공조와 내부온도관리 등이 구역(Zone) 별로 구분되는 대형 오피스나 상업건물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은 아닙니다.
다중 존 건물의 해석은 ECO2나 Energy Plus, Trnsys와 같은 기존의 프로그램들로 가능한데요.. 이는 역으로 이들 프로그램의 주요 타겟이 대형 건축물임을 의미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대형 건축물은 에너지 해석에 많은 전문지식과 수고를 필요로 하기에 값비싼 상용 프로그램들의 주요 고객이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ECO2의 경우는 국내 에너지효율등급 인증을 위한 무료 프로그램이지만 주요 인증 대상이 대형 공공건축물인지라 이 역시 다중존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중 존 프로그램은 공간(Zone) 별로 외벽과 내벽, 공조설비 등의 정보를 빠짐없이 입력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어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상당히 복잡해진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독주택, 아파트, 5층 이하 근생과 같이 단일 존으로 간단한 해석이 가능한 95%의 중소규모 건축물의 에너지 시뮬레이션에는 상당한 불편함이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PHPP가 전략적으로 단일 존을 선택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5%의 대형 건물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95%에 해당하는 보통의 건물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니까요. (물론 이 시장이 마케팅 측면에서 수익 창출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습니다.) 에너지관리공단/건설기술연구원에서도 이런 점을 인식해서 기존의 프로그램을 간략화한
ECO2-OD(Office Design)를 출시하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ECO2-OD는 건물 전체를 단일 존으로 가정하고 간단한 입력을 통해 건물에너지소비총량 평가를 할 수 있도록 만든 프로그램입니다.)
문제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ECO2-OD는 디테일이 부족하고, PHPP는 사용이 불편하다는.. Energy#의 포지셔닝도 이 지점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즉, 95%의 보통의 건축물(단일존)의 에너지 해석을 지원하되 디테일 하면서도 편리한 해석 환경을 제공하자는 것이죠.
아시다시피 이 프로그램은 무료이고 지속적인 업데이트도 지원할 예정입니다. 공익적인 목적에서 시작된 일인 만큼, 장기적으로는 Energy#의 해석결과를 에너지소비 총량 평가나 에너지효율 등급제에도 적용할 수 있는 공식 인증 프로그램으로 발전시켰으면 하는 바램도 있습니다.
아울러, 패시브/제로에너지 건축물에 특화된 에너지 평가 툴로서 PHPP를 능가하는 경쟁력을 갖춰나가는 것도 중요한 목표입니다. 그런 점에서 프로그램 출시와 함께 한국패시브건축협회의 공식 인증/교육 프로그램으로 채택된 것은 무척 좋은 출발이라 생각합니다.
이제 95% 보통의 건물을 위한 최적의 의사결정 보조도구를 향한 첫 발을 뗐습니다.
작은 시작이 의미있는 결과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여러분의 많은 참여와 의견 부탁 드립니다.
* Energy# 최신버전 다운로드
뜻이 있어서 길을 여시었으니 많은 이들이 그 길을 따라 걷게 될 것입니다.
저는 아직까지 관련 프로그램(PHPP)을 익히고자 시도했던 적도 없었습니다만, Energy# 에 대해서는 달리 마음을 갖겠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꼭~~~
서기관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김선생님/ Energy#이 아직 국가의 공식 인증 프로그램은 아니지만 분석툴로서는 충분히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개선 전후의 데이터 입력과정에서 궁금하신 부분 있으시면 언제라도 말씀 주세요! 다만, 리모델링이면 내단열을 채택할 수 밖에 없을 듯 한데, 선형열교 해석/입력이 수반되어야 할 수도 있겠네요..
책을 읽으면서, 간간히 저자의 공직자로서 국가에 대한 사명감..이런 것을 느꼈었는데 결국 이러한 일을 해내셨군요.
현재 설계 중인 집의 평가에 도전해봐야 겠습니다.